안녕하세요 여성가족부차관 이숙진입니다. 오늘로 이런 인사를 마감하게 됩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주말이면 작별인사의 한줄 한 줄을 적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다시 보니 많은 부분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녹록치 않은 ‘현실’을 외면하고 바람직한 ‘이상’만을 쫓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인사의 말미엔 여전히 약간의... 아주 약간의 이상이 담겨있음을 미리 고백합니다.

오늘은 제가 문재인 정부의 여성가족부 차관으로 부임한지 605일이 되는 날이라 합니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길게 느껴집니다. 그 시간동안 저와 여러분은 ‘평등이 일상이 되는 대한민국’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고, 오늘은 다 이루지 못한 그 꿈을 여러분께 숙제로 남겨두고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취임한 날부터 줄곧 따뜻한 웃음으로 여러분을 맞이하고 싶었는데 늘 쉽게 웃을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난 1년 8개월 동안 우리는 여성인권과 성평등 분야에서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격변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미투로 시작된 사회변화의 열풍이 디지털 성범죄 근절 요구로 이어지고,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수만 명의 여성들이 광장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23분 남으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의 피눈물어린 바람과 절규가 헛되지 않도록 화해치유재단의 해산도 조심스럽게 진행해왔었습니다.

그 변화의 거센 바람 속에서 흔들림없이, 의연하게 대책을 마련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은 것은 모두 여러분들의 노고 덕분이었습니다.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여러분은 한국 사회 성평등의 역사에 이정표를 그을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하신 분들이시며 그러한 자부심으로 한국사회 희망의 한 축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열정과 수고로 누군가의 삶과 일상은 분명히 바뀌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여성부, 여성가족부는 태생부터가 고난이었습니다. 성평등을 추구하는 가치를 지닌 부처는 평등하지 않은 현실을 변화시켜야 하는 책무를 가지고 있기에 늘 맞서 주장하고 이해시키며 2배 3배의 설득과정을 거쳐야만 하나의 작은 변화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작은 부처이니 더 열심히 더 노력하라는 요구가 뒤따랐습니다. 우리의 사고와 기획은 빈틈과 사각지대를 찾아드는 탐정이 되었고 중복업무를 피해가는 자기 검열, 부처 검열이 또 하나의 필수 업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격랑같은 한해를 보내면서 우리가 깨달은 것은 여성가족부는 자신의 온 생을 걸고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부처이며, 민주주의를 완성해가는 부처라는 것입니다.

성평등 사회,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므로 포기하지 맙시다.

이 글을 쓰면서 ‘공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공무원. 공무를 담당하는 사람이겠지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떠해야 할까도 생각해봤습니다. 그것도 여성가족부의 공무원은 어떠해야 할까를 말입니다.

성평등 사회라는 포기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여러 사람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여성가족부 공무원이리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여성가족부 공무원은 불평등한 현실이 남아있는 한 성평등 사회를 만들려는 마지막 한 명의 공무원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며 모든 정책과 제도의 성주류화를 위해 힘있게 싸워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가족부 직원분들의 일상도 평등하고 건강해야 하므로 민주적인 여성가족부 조직문화 정착을 위해 간부님들을 비롯한 직원여러분들의 노력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카르페디엠이라는 라틴어가 나오지요. 보통은 산적한 과제가 있는 와중에도 어느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길 때 ‘카르페디엠!’를 외칠 것입니다. 현재를 즐기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는 곧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평가와 승진이 여러분 앞에 놓여 있고, 복도에서 들리는 통신들로 마음이 울적하더라도 이 순간에 충실하여 이 순간을 즐기는 자기 자신 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제 앞에 놓여있는 책들을 적어봅니다.

‘주적은 불평등이다’, ‘유연근무제와 페미니즘’, ‘문득 하늘을 보다’, ‘당신이 옳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 ‘선망국의 시간’, ‘그림 속에 너를 숨겨놓았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독립투사 이상룡 선생 손부 허은 회고록)’, ‘전진하는 페미니즘’,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분배정치의 시대’....

공무를 보시는 틈틈이 책과 가까이 하신다면 훨씬 현재를 즐기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없는 여성가족부는 보다 나은 여성가족부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빕니다.

2018년 2월8일

여성가족부 차관 이숙진 드림

김은영 기자  webmaster@jyb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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