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전각의 명인 정민조 작가에게 있어 작품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인연이다.





술 향기에 취해 그윽한 달밤. 박달나무 속에서 李白의 詩 한 편 건져 올린다. 벼린 칼끝으로 글자 한 자 파내고, 소가죽 봉 두드려 글자 두 자 끄집어낸다. 갓 꺼낸 글자들이 목판 위로 은은하게 돋아 오른다.

일도 일도(一刀 一刀) 새김질 할 때마다, 글자 한 자에 도도한 산맥이 일어서고, 또 한 자에 유장한 강이 흐른다. 그리고는 술항아리 속 향기로운 술이 익어간다. 이백이 밤새 '달빛 아래 홀로이 술을 마시는' 것이다.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꽃들 사이에 술 단지 놓고 앉아, 같이할 친구 없이 홀로 술을 마시네. 술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니, 마주한 내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네.'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 첫째 수>

술잔 속에 어리는 달빛이나 자신의 그림자까지도 벗하여 술을 마셨던 주선(酒仙) 이백. 그리고 그의 자유분방한 일생과 시편들이 좋아, 박달나무에 그의 시를 꼭꼭 새김질하는 전각가 정민조. 그들의 '고금(古今)을 관통하는 내밀한 교류'는 깊고도 넓다.

현대 목전각의 명인 목불(木佛) 정민조 작가를 만났다. 울산 진하에 고죽산방(古竹山房)을 앉힌 지 몇 해. 그의 초옥(草屋)에 나무향이 은은하다. "현판이 없네요?" "선친이 쓰시던 '고죽산방'을 이어 쓰고는 있지만, 선친의 경지에 누가 안 될 때 달려고 합니다." 그의 선친 석불(石佛) 정기호 선생은 대한민국 국새 1호를 새긴 전각계의 큰 어른이다.

"그래도 당호(堂號)가 안 걸리고서야 마음이 안정되겠습니까?" "마음 놓는 자리가 명당이라 하잖아요? 제가 앉은 곳이 '고죽산방'이라 생각합니다."

"정확히 전각(篆刻)이 무엇입니까?" "전자(篆字)체를 각(刻)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나무나 돌, 금속 등에 인장이나 글자를 새기는 작업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서화의 낙관과 인장을 새김질 하는 작업'으로 인식되었는데, 요즘은 '인장문화'에서 벗어나, 현대적 감각의 조형예술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전각이 그렇다. 그는 글자의 회화성을 강조하고, 조형성을 위해 전통의 틀을 과감하게 깨뜨린다. '목전각의 현대화'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현실의 틀'에서 자유로웠던 이백을 흠모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겠다. "시선(詩仙)으로 불리던 이백은, 평생을 얽매임 없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실의 것들에게서 자유로웠고, 그러한 삶이 시와 술, 그리고 죽음에까지도 초극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항상 닮고 싶은 사람이죠."

부인이 정갈하게 차린 밥상을 내온다. 흑미 고봉밥에 학공치국, 산초짠지, 오징어젓갈에 파래무침, 묵은지, 멸치볶음… 상차림이 토속적이라 받아든 마음마저 푸근하다. 밥상 한 귀퉁이에 포도주 한 잔도 빠지지 않는다. "포도만으로 자연 발효시켜 만든 술입니다. 주정이 안 섞여 약으로 먹습니다." 포도의 달콤하고 향기로움이 방안 가득 그윽하게 퍼져난다.

"술, 참 좋은 음식입니다. 작품 구상할 때도 그렇지만 완성한 후, 혼자 술 한 잔 놓고 감상할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독오(獨娛)'라는 말이 있는데, '혼자서 즐긴다'는 뜻입니다. 제가 술상을 마주하고 작품감상 하는 일이 바로 '독오의 경지'라고 봅니다."

작품이 끝나면 며칠동안 술로 밤을 새운다는 목불. 그에게 있어 술은 작품구상의 실마리요, 작품새김질의 마무리다. 한 잔 술의 거방진 푸닥거리가, 그의 작품에 있어 '시작과 끝'으로의 '들고 나는' 일이다.

자유방송  shs051@korea.com

<저작권자 © 자유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