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패션쇼를 위해 오전 7시부터 모델들이 집합하고 스태프들은 전날 밤을 꼴딱 새우고 옷을 실은 채 루브르로 이동했다.

4시간의 기다림은 매번 그러하듯 정신없이 지나갔다. 쇼 장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지시와는 달리 만들어진 무대였다. 무대 뒤에서는 모델들의 메이크업과 헤어를 일일이 체크하고, 도착한 옷과 구두를 모델별로 입기 편한 위치에 배치하며 헬퍼들에게 필요한 사항들도 설명해야 한다.

속은 타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알 수 없다.

쇼 시작 20분전부터는 모델들이 입을 옷을 체크하고 마무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관객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10분마다 무대를 기웃거린다. 쇼 시작 20분전인데도 텅 비어있는 객석이 보통 신경쓰이는 게 아니다.

홍보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내 앞 시간의 쇼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안도의 시간도 잠시, 기자들이 입장하고 있다는 소식에 내다본 객석은 아직 반도 차지 않은게 아닌가. 가슴이 조여와 난 또 다시 커피잔을 잡고 마음을 다잡는다.

프랑스의 통상부장관 크리스틴 라가드가 5분후면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것 때문에 관객의 입장을 미루고 있다는 말에 난 다시 용기를 내고 모델들과 무대 뒤에서 사진 기자들의 요청에 맞춰 카메라를 향해 웃음을 던져본다.

메이크업을 위해 따로 떨어져서 준비중인 키메라씨에게도 가본다. 여유있는 웃음으로 날 위로하는 키메라씨는 20여년만의 무대라고 하면서 직접 자신의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

패션쇼 무대 뒤는 그야말로 전쟁이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이름을 불러대고, 소매 단추를 채우지 못해 무대 입구까지 쫓아가며 단추를 끼워준다. 왜 이리 손은 마음처럼 잘 움직이지 않는지 금세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정신없는 17분의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모델인 리사칸트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워킹은 모니터를 통해 보는 내 눈에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리고 아련한 연기가 깔린 무대위에 키메라가 등장한다. 음악도 신곡인 카루소가 흘러나온다. 하얀 천사처럼 노래를 부르며 무대로 나가는 키메라.

이번쇼의 주제인 천상의 피조물처럼 그녀의 노래는 하늘에서 울리는 사랑의 노래였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고 무대로 뛰어나가는 내 얼굴에는 이번에도 해냈다는 감동과 흥분이 가득 찼다. 무대 위의 키메라를 끌어 안았다.

그렇다. 난 키메라씨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작년 10월 봄/여름 쇼가 끝나고 다음 쇼는 무엇이 좋을까 고민 끝에 우리나라의 아티스트를 생각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키메라를 떠올렸다.

제일 먼저 인터넷을 통해 너무 오랫동안 잊혀졌던 키메라의 기억들을 찾아 자료를 모았다. 그녀의 유럽에서의 성공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때 그녀의 화려한 화장과 의상, 아름다운 노래는 많은 유럽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아직까지도 유럽에는 키메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파리 홍보담당자인 티보는 열렬한 키메라의 팬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사실 서울에서 준비하다가 그만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사는지 연락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녀의 이미지를 동의없이 사용할 수도 없어 자포자기 하고 있었다.

한 방송 관계자로부터 키메라를 취재할 계획이라는 소식은 들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의사를 타진했을 때 기꺼이 무대까지 서겠다는 대답에 난 인연이란 참으로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패션 쇼 이틀 전에 키메라와 그녀의 남편, 수행원들이 도착했다. 하지만 그녀의 패션쇼 출연에 파리 스태프들은 우려와 불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사진 기자들이 일어나고 나가버린다면 패션쇼나 키메라 자신에게도 상처가 된다는 말에 우리는 몇 시간씩 대책을 강구하고 흥분하며 싸웠다.

키메라씨를 두고 시작된 논쟁이 그 다음날도 계속 됐다. 나는 키메라씨가 꼭 무대에 서야한다며 내가 책임지겠다고 스태프들을 설득했다.

쇼 시작 2시간전에도 걱정하는 나를, 키메라씨는 무대에 서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어도 된다며 "이 쇼는 이상봉 선생님의 무대이니까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나를 감격하게 했다.

숱한 우여곡절과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이 가슴 졸이던 시간을 거쳐, 많은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무대 뒤까지 직접 찾아준 크리스틴 라가드 장관 등 고마운 이들에게 인사하고 인터뷰를 하고 있던 도중에 키메라씨가 공항으로 출발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자리를 통해 패션쇼에 참여해준 키메라씨에게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 날의 짧지만 감동적인 쇼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지난 2월 키메라씨와 함께 한 멋진 파리쇼 무대를.

자유방송  shs051@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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