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여비서들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 그는 영정 앞에서 목례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지난 37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상을 지극정성으로 지켰던 이희호 여사였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 오열하다 한때 자리에 누웠던 이 여사는 18일 오후 5시30분께 빈소가 차려지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어서서 조문객들을 맞았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이자, 민주화의 상징인 남편과 동행한 반세기. 김 전 대통령에게 이 여사는 고난과 영광이 교차하는 자신의 삶을 함께 걸어온 미안하고 고마운 동지이자 동반자였다. 지난해 출간된 이 여사의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회에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김 전 대통령은 "고난을 이겨낸 힘이 된 것도 아내요, 내가 영광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도록 내조를 한 것도 아내"라며 아내의 두 손을 잡고 번쩍 들었다.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라는 자서전 부제도 직접 붙였다.

1922년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서울대 사범대, 미국 유학을 거쳐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했던 당대의 엘리트이자 신여성이었다. 대한여자청년단(YWCA) 등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가난한 정치 재수생이었던 김 전 대통령을 만나 결혼했고 가택연금, 재판, 구금, 망명을 반복했던 남편 곁에서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주위에서 눈물로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만류할 정도로 반대가 심했지만 이 여사는 "우리 내외는 수십 년간 고난과 빈곤과 모함을 해치고 살아왔다. 남편인 김 대통령이 저와 일생을 동행하며 저를 아끼고 도와준 데 고마움을 느낀다"며 동반자와의 만남을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표현했다.

동지이자 운명이었던 남편이 떠나기 직전인 이날 오후 1시 20분, 아침부터 중환자실을 지켰던 이 여사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저희에게 보내 주세요"라며 남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맞대고 기도를 올렸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의 측근, 가족들과 함께 "사랑해요"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20여분 뒤 김 전 대통령이 눈을 감았다. 남편을 위해 아내가 짬짬이 뜨개질을 해 만든 벙어리 장갑을 손에 낀 김 전 대통령은 47년간 지켜본 모습 가운데 가장 평온한 얼굴이었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여사님은 기적을 믿으셨고 김 전 대통령이 반드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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