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 술 한잔 따라 주세요!”

“네?”

지난 연말 서울의 친이(親李)계 한 초선의원이 서울 시내의 한 식당에서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에게 불쑥 ‘누님’이란 호칭을 썼다. 이날 서울에 지역구를 둔 친이계 의원 세 명과의 만찬을 주선한 것은 핵심 친박(親朴)계 의원. 이 친박계 의원은 친이계 의원들에게는 사전 예고도 없이 불쑥 박 전 대표를 약속장소에 데려갔다고 한다. 이날 저녁 자리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평소 당내 분위기메이커로 통하는 친이계 초선의원은 격식을 생략한 채 박 전 대표에게 너스레를 떨며 친근감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분위기에 따라 폭탄주 한두 잔은 하는 것으로 알려진 박 전 대표는 웃는 표정으로, 이 서울의 친이계 초선의원에게 술을 따라줬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친이·친박 등 계파에 얽매이지 않고 당내 의원들과 개별적인 만남을 꾸준하게 갖고 있다. 한나라당 내 복수의 사람들에 따르면 1년 전부터 박 전 대표는 사석에서 동료 의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등 물밑 소통을 해왔다. 한나라당 친이계 핵심 의원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박 전 대표가 만난 한나라당 의원은 전체 171명 중 80%에 가까운 140여명 정도다. 모임은 대체로 3~5명 정도가 참석하는 소규모로 이뤄졌고 일부 의원의 경우 두 차례 이상 중복해서 만나기도 했다는 게 친박 진영의 설명이다. 이는 평소 공식석상에서 말을 아껴온 박 전 대표의 대외적인 행보와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른바 ‘집토끼’에 해당하는 당 소속 의원들과 교감을 나누기 위해 박 전 대표가 그동안 나름대로 공을 들여왔다는 방증이다. 결과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다. 박 전 대표와 비공개로 만났던 의원들은 대부분 “박 전 대표가 우리 말에 귀 기울여 주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 좋은 느낌을 받았다”는 반응이었다고 친박 진영은 전한다.

박 전 대표가 동료 의원들과 이처럼 ‘몰래 데이트’를 시작한 건 2007년 당내 경선 패배 이후 “동료 의원들과 스킨십을 넓혀야 한다”는 측근들의 말을 수용한 결과다. 박 전 대표도 ‘대선 재수’를 하는 만큼 2007년 당내 경선의 패인 분석을 적극 수용하고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소리없이 움직였다

박 전 대표와 당내 의원들의 만남은 주로 친박계 의원이 식사 자리를 제안하고 박 전 대표가 합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때론 사전에 예고 없이 동석해 친이계 의원들이 놀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주로 박 전 대표의 비서실장 격인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재선의원·경기 김포)이나 이학재 의원(인천서구 강화군갑) 등이 평소 개인적 친분을 나누는 동료 의원들과 식사 자리를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계 의원들은 우연을 가장한 만남으로 상황을 연출하는 등 언론의 관심을 최대한 따돌려 왔다. 박 전 대표의 물밑 행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처럼 조심스러운 접근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친이계로 분류되는 수도권 한 초선의원은 익명을 요구하며 “그동안 언론에서 박 전 대표의 움직임을 주목하지 않아 거의 알려진 적이 없을 뿐, 박 전 대표가 사석에서 동료 의원들과 스킨십을 가진 건 1년 전부터다. 친박 핵심으로 분류되는 선배 의원이 식사를 한번 하자고 하면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고 ‘박 전 대표를 만났다’고 외부에 떠들고 다닐 필요도 없기 때문에 노출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박 전 대표 측의 스킨십은 친이계 핵심으로까지 파고들었다. 지난해 11월 친박 진영에서 조직을 담당하고 있는 이성헌 의원(서울 서대문갑)이 친이계 핵심인 정두언 의원(서울 서대문을)과 만남을 제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지난 2007년 대선 때부터 지난해 전당대회까지 감정적인 충돌을 반복해온 ‘앙숙’이었으나 이날 만남으로 서먹했던 관계가 상당히 복원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의원뿐만 아니라 친박 진영의 참모들도 이명박 대선후보 진영에서 활동해온 인사들과 접촉하며 관계 복원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 진영이 친이계의 공고한 틀을 허물기 위한 전략을 구사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료 의원들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박 전 대표는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복수의 의원들이 전했다. ‘보수(保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서두에 던지고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 보수 정당을 표방해온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어떤 정치철학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만큼 관심이 많다고 했다. 지난해 박 전 대표와 사석에서 두 차례 이상 만난 중립 성향의 한 의원은 “몇 번 만나보니까 박 전 대표가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이 있다. 보수에 대한 입장이 뭐냐는 거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동료 의원의 답변을 듣고 나면 박 전 대표도 자신이 생각하는 보수에 대한 담론을 짤막하게 언급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면 박 전 대표는 자신이 대선 슬로건으로 내세운 복지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경제와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의원들의 생각을 듣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게 동석했던 인사들의 전언이다. 비공개로 만나는 사적인 회동이기 때문에 정치 현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특히 복지 문제에 있어서 나름대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 전 대표와의 사적인 만남에 대해 당내 의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는 건 향후 선거를 겨냥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장은 내년 4월로 다가온 19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과반은커녕 수도권에서 절반도 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난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 진영의 두뇌 역할을 맡은 모 대학 교수는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고전을 면치 못할 거다. 특히 수도권은 분위기가 더 나쁘다. 10곳 중 3~4곳을 건지면 다행인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을 제외한 구청장 선거에서 완패했다. 그 여파로 인해 18대 총선 당시 서울 지역에서 당선된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애를 먹고 있다. 서울 지역 일부 구청장은 지역 행사에서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을 원외 민주당 인사보다 늦게 소개하거나 발언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강남지역 한 국회의원은 “우리 지역은 그나마 상황이 좋은 편이지만 강북지역의 경우 구청 주최 행사에 한나라당 의원의 좌석을 만들지 않거나 뒤쪽에 만드는 등 현역 의원들이 수모를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박 전 대표와의 사적인 만남은 차기 대선을 준비하는 예비주자와 총선을 치러야 하는 의원들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만남이다. 박 전 대표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의원들과 교류함으로써 지지세를 확대할 수 있다. 박 전 대표의 지지 여부가 당선을 좌우할 정도로 친박 성향이 강한 대구·경북 지역 친이계 의원들의 경우 친박 성향의 경쟁자가 출현하는 상황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스킨십을 넓히고 있는 박 전 대표가 지난 1월 3일 2박 3일 일정으로 대구와 경북지역을 방문한 자리에 해당 지역 국회의원들이 대거 몰린 것도 박 전 대표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자리였다.


지방서도 대세론 확산

박 전 대표가 대선 레이스에 시동을 걸면서 원외와 지방에서도 친박 지지모임이 새로 조직되거나 활성화되고 있다. 충청지역의 경우 친박계 정우택 전 지사와 강창희 전 최고위원 등을 고문으로 하는 사조직이 출범해 당 공식 조직과 신경전이 일고 있다. 이른바 박 전 대표를 지지하는 당 외곽세력들이 당내 조직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40대 초반의 한나라당 한 인사는 “박 전 대표 쪽에 캠프 구성이 이미 끝났다는 말도 들린다. 조기에 바람이 불면서 비공식 조직이 만들어지고 여기에 줄을 대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박 전 대표 쪽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반박 진영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지지세가 당 안팎에서 강화되는 건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하며 대세론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30~40%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손학규 민주당 대표, 유시민 전 장관 등과 3배 이상 지지율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박 전 대표가 조기에 한나라당 대선주자로 굳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원내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친이계 유력인사들의 눈치를 보느라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지만 지방의 민심이 급격하게 친박으로 흐르고 있는 점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박 전 대표와 손학규 대표 등 차기주자들에게 러브콜을 받고 있는 ‘경제통’ 김종인 전 의원은 이와 관련해 “지금 내년 대선을 예상한다는 건 큰 의미가 없겠지만 굳이 질문을 한다면 박 전 대표와 야권 단일후보 간 대결이 될 공산이 크다. 단, 박 전 대표의 참모들이 2007년 당내 경선 패배 이후 시대적 흐름에 맞춰 얼마나 유연하게 사고를 전환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이처럼 대선 레이스를 앞당긴 배경은 당내 경선에서 불거질 돌발변수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친박 진영에선 2007년 당내 경선 패배 직후 “다 이긴 게임에서 졌다”는 푸념이 많았다. 당내 조직에서 앞섰지만 이명박 후보의 등장과 대북 문제 등 각종 변수에서 지지율이 하락하며 결국 간발의 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생긴 친이계 진영과의 앙금이 아직도 여전한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차기주자 키우기를 하고 있는 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김태호 전 경남지사를 국무총리로 깜짝 발탁한 이면에는 차기주자를 육성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많았다. 김 전 지사의 자질 문제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향후에도 친이계에서 박 전 대표의 대항마를 키울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박 전 대표가 조기에 대세를 장악하면 사안마다 충돌해온 친이계 인사들의 정치생명이 담보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가 대선 이슈를 조기에 띄우는 건 준비된 대선주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정부 수립 이후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공감을 얻기가 어려운 점,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다는 지적 등을 이슈 선점을 통해 돌파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지지율 고공행진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한 이회창 후보의 사례에서 보듯 30% 선에 고착화된 지지율을 유연하게 넓혀놓을 필요가 있다는 자체 진단도 있었다고 한다.


집안 단속 나선 친이계

이재오 특임장관 등 친이계도 박 전 대표에 맞서 집안단속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12월 박 전 대표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출범식에 안병률·김정훈 의원 등 친이계 의원의 참석률이 10여명 선에 그쳤다는 점도 이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이 장관은 작년 말 당내 친이계 모임인 ‘함께 내일로’ 송년회 자리에서 “한나라당은 이명박 정부의 모든 공과(功過)에 대한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한나라당이 잘해야 (차기 대선에서) 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박 전 대표가 대선레이스를 본격화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어서 친이계 주류의 결속을 주문한 것으로 해석됐다.

한 초선의원은 “차기주자들의 경쟁은 연말부터 서서히 달아올라야 초선들도 몸값을 높일 수 있는데, 조기에 달아오르는 바람에 빨리 줄을 서지 않으면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박 전 대표의 대세론을 외면할 수도, 친이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도 없어 눈치를 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여권에선 이 대통령이 연초 다시 부른 박형준 정무특보와 이동관 언론특보의 역할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박 특보는 차기 총선, 대선과 관련해 이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밑그림’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표의 독주에 대한 분석과 흥행 카드에 대한 시나리오를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일각에선 “너무 일찍 달아오른 박근혜 대세론이 4월 재보궐 선거를 전후해서 한 차례 고비를 맞게 될 것이다” “대북문제 등 다양한 변수들이 있기 때문에 친박 진영이 조기 레이스를 시작한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자유방송  shs051@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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