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회관서 공동생활… 농촌 주거문화까지 바꿔

칠십 먹은 할머니가 막내… 난방비 등 생활비도 절약 의령 등 지자체 지원나서

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의 한동마을 초입에 자리 잡은 1층 건물. 이곳엔 하나같이 '뽀글뽀글' 파마를 한 할머니 10여명이 한가족처럼 모여 산다.

"집에 가 봐야 놀아줄 영감이 있나. 혼자 '테레비' 보고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제…. 여그 오면 화투 칠 사람도 있고 얘기할 사람이라도 있응께 좋지."

입심이 좋은 송길순(74) 할머니가 한마디 하자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도 "그라제~ 그라제~"라며 맞장구를 쳤다. 마을회관은 노인들의 집과 다름없다. 밥을 먹으러 집으로 흩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밤낮을 이곳에서 보낸다.

이곳 할머니들은 모두 홀로 사는 노인들이다. 길게는 20여년 전, 짧게는 5년 전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았다. 마을엔 할아버지들도 4~5명 있지만 할머니들의 '기세'에 눌려 이곳을 찾지 않는다. 할머니들은 온종일 화투놀이·TV 시청·잡담하는 것이 전부지만 빈집을 혼자 지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반응이다.

◆마을회관 개조해 공동 생활하는 노인들

농촌사회의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2~3년 사이 노인들의 주거문화가 바뀌고 있다. 딱히 누가 모여 살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농촌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마을회관과 경로당에 모여 먹고 자는 '노인 그룹 홈'이 시작된 것. 최소한 잠은 집에 가서 자더라도 모든 일상생활을 경로당·마을회관에서 해결하는 방식은 농촌에선 이미 일반화됐다.

집이 없어서가 아니다. 한동마을 노인들 역시 마을회관에서 멀어야 200m 반경 안에 각자 집이 있다. 하지만 노인들에게 집은 잠시 들르는 곳일 뿐이다. 마을회관에서 모든 끼니를 해결할 수 없어 집에서 1~2끼를 각자 해결한다. 마을회관 작은 방의 장롱엔 할머니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고, 각자 사용하는 이불이 있다. 주방엔 식기와 전기밥솥이 있고 노래방기기와 냉장고도 있다.

최고령인 배인례(95) 할머니를 비롯한 90대 노인이 3명이고 대부분 80대. 주귀득(75) 할머니를 비롯한 70대 중반 할머니 3~4명은 이곳에서 '막내'다. 주 할머니는 "내가 여기서 제일 어리니까 밥도 열심히 하고 할머니들 청소나 심부름도 도맡아서 한다"고 말했다. 노인이 노인을 모시는 셈이다. 이 마을 이영섭(61)씨는 "할머니들끼리 모여 있으니 누가 아파도 바로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난방비 등 생활비 절감 가능

노인들이 모여 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생활비 절약을 위해서다. 모여 살면 기름값·전기료는 최소한 줄일 수 있다. 함께 식사를 하다 보면 식비도 아낄 수 있다.

경북 문경시의 산북면 대상리 노인회관의 경우 여름철엔 평균 20여명, 겨울철에 40여명의 노인들이 몰려든다. 대상리 경로당에서는 거의 매일 노인 20여명이 각 방에서 점당 10원짜리 화투 놀이판을 벌인다. 큰 방은 '남노인방'으로, 식당이 딸려 있는 작은 방은 '여노인방'으로 부른다. 여노인방에 모여 있는 할머니들이 식사 당번이다. 황의환(77) 할아버지는 "쌀과 반찬은 각자 집에서 들고 오거나 반찬값으로 형편에 따라 1만~2만원씩 내서 해결한다"며 "말벗이라도 해줄 친구 있고 밥 있는 경로당 놔두고 왜 빈집을 지키겠느냐"고 말했다.

◆노인 공동 생활은 한국만의 특징

노인들의 공동 생활이 확산되면서 정책적으로 지원을 하는 지방자치단체도 등장하고 있다. 경상남도 의령군의 경우 조례를 제정해 노인들을 위한 공동 거주제를 실시하고 있다. 의령군의 노인인구는 전체 인구의 30%인 9100여명 수준. 의령군에선 16곳의 마을회관에서 100여명의 노인이 공동 생활을 한다. 전북 김제시에서도 2006년부터 노인들의 공동 거주를 지원해 경로당·마을회관 등 57곳에서 600여명의 노인들이 모여 산다. 이 같은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노인들의 공동체 생활이 확산되는 또 다른 이유는 최근 농사짓는 노인들이 사라져 농촌 노인들도 할 일이 없어지고 있기 때문. 김경우 문경시 문경읍장은 "예전처럼 여름 땡볕에 괭이질하고 잡초 뽑는 노인은 거의 없다"며 "요즘은 트랙터·이앙기 등 농기계가 있는 젊은 사람 3~4명이 마을 전체 농사를 다 짓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노인들의 집단생활이 가능한 것은 공동체 생활 문화가 남아 있는 한국 농촌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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