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동 쪽방촌에 살고 있는 이정란씨(61)는 겨울이 두렵다. 3.3㎡(1평)의 좁은 방에서 하루 종일 누워 지내는 그는 "관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좁은 방이라도 난방만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날이 갑자기 추워진 지난주엔 집주인이 "전기요금이 얼마나 나오는 줄이나 아느냐"며 몸이 편찮은 옆방 할머니의 전기장판을 빼앗아가는 광경을 봤다. 그는 야박한 인심 때문에 올겨울이 더 춥게 느껴진다고 했다.

냉천동의 월세 25만원짜리 ㅇ고시원에서 만난 심옥자씨(66)는 "한 달 생활비로 17만원을 쓰는데, 전기장판 사용료로 한 달에 1만원을 더 내야 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고 털어놨다. 그는 "고시원의 30여개 방에서 모두 이걸 사용하다 자칫 불이라도 날까 싶은 두려움도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릎이 안 좋은 데다 신발은 밑창이 닳아 미끄러지기 십상이어서, 올겨울에는 집안에서만 지낼 예정이라고 했다.

올가을 추위는 일찍 왔다. 11월 초부터 기온이 뚝 떨어졌다. 기자들이 만난 저소득층 주민들은 난방비가 없어 추위에 떨고 있었다.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다는 이들도 있었다. 절박했다.

쪽방이 밀집해 있는 서울 용산구 동자동 골목에서 17일 오후 주민들이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이들에겐 다가오는 겨울이 두렵기만 하다. 문래동 쪽방촌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애순씨(62)는 "1장에 600원 하는 연탄값이 더 오를 예정이라는데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단돈 100원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작은 액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석배씨(64)는 인력시장이 인근에 있다는 이유로 논현동의 ㄱ고시원에서 홀로 살고 있다. 조경 관련 일용직으로 5년을 살아온 그는 이달 들어 1주일에 한 번 일을 나갈까 말까 하는 처지다. 운좋게 일감을 얻어도 일당 6만5000원으로는 식비조차 모자란다. "고시원 주인에게 걸핏하면 쌀 좀 달라고 하는데, 내 자신이 봐도 신세가 딱합니다." 그의 아들과 부인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 PC방 사업에 실패한 아들과 다단계판매 사기를 당한 부인이 입은 피해액만 1억원이 넘는다. 돈 못 버는 죄책감에 몰래 집을 나왔다. 월 25만원 하는 고시원비도 넉달치나 밀려 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지만, 행여나 부담될까 싶어 아들을 찾아갈 엄두도 못 낸다.

지난 추석 때 물난리로 살림살이를 잃은 수재민들도 비슷한 처지다. 화곡동 반지하방에서 만난 박영자씨(68)는 "누비옷 2벌로 겨울을 나고 있다"고 말했다. 겨울용 외투 5벌을 보관했던 종이상자는 수해 때 물이 들어차는 바람에 모두 못쓰게 됐다. 그나마 빨아 입을 수 있는 옷은 얇은 점퍼 2벌. 정부로부터 100만원을 피해복구 지원금으로 받았지만 이 돈은 도배하고, 장판 깔고, 중고 세탁기와 밥솥 사는 데도 부족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신월동 수재민 김은경씨(41)는 두꺼운 이불이 없다. 내복에 외출복까지 입고 '중무장'한 채 잔다. 도시가스는 요금이 연체돼 지난 5월부터 공급이 중단됐다. 취사는 부탄가스와 버너로 해결한다. "수해로 옷을 다 버려 아이들도 겨울옷이 없어요.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도 전부터 내복을 입혔는데 올겨울 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하죠." 가스비가 없어 아이들은 한겨울에도 찬물로 세수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창신동 인력시장은 한 푼이 아쉬운 사람들로 새벽부터 북적거린다. "요새는 집값도 떨어지고 건설경기가 안 좋잖아요. 그나마 간간이 있던 일도 날 추워지면 뚝 끊겨요. 간혹 들어오는 일은 인력소개소 사장의 눈에 들어 미리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다 가져가고 없죠." 김수철씨(54)는 "일만 있으면 추위도 걱정 없을 텐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영하의 날씨지만 하루 종일 일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무료 급식소를 찾는 사람들은 자꾸 늘어만 간다. 청량리 굴다리 옆 '밥퍼나눔운동본부'에는 하루 평균 1000명이 찾아와 끼니를 해결하고 간다. 갈 데 없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이 쏟아지다보니 인원이 여름철의 2배다. 점심을 제공하는 급식소 앞에는 새벽부터 줄이 늘어선다. 현장에서 만난 이찬씨(77)는 오전 6시 인천 주안역에서 급행 지하철을 1시간여 타고 청량리까지 나와 밥을 먹는다고 했다. "식사는 오전 10시45분부터 시작하는데 혹시 늦으면 밥도 못 얻어 먹을까봐 출근도장을 찍고 있는 거지."

노숙인들이 겨울을 나려면 사실상 목숨을 걸어야 한다. 두 달여 전 창신동 쪽방촌에 들어왔다는 호창웅씨(53)는 지난 겨울 노숙생활 당시 눈을 맞고 자다가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랐다. 아직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역시 돈이 문제다. 이 계절에는 무료 진료를 원하는 사람이 급증하지만 제대로 된 도움을 받을 곳은 드물다.

서울역 '노숙인 다시서기' 무료진료소의 경우 겨울철에 24시간 응급대책반을 가동하지만 공중보건의 2명과 내과 전문의 1명이 의료진의 전부다. 방사선 장비가 있지만 노후한 데다 이 장비를 다룰 전문의는 자원봉사로 1주일에 세 번만 온다.

부산에서 아홉살된 딸과 함께 상경해 영등포역에서 한 달여 노숙을 했던 서모씨(47)는 "종교단체의 도움으로 쪽방을 얻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단돈 얼마라도 벌 수 있는 일자리는 구하기 어려워 언제고 다시 노숙하게 될지 모르는 처지다. 자신은 옷만 단단히 입으면 추위를 견딜 수 있지만 딸아이가 떨 생각을 하면 한숨이 앞선다.

겨울철만 되면 구세군 자선냄비나 '사랑의 열매' 등 요란한 모금 활동이 벌어지지만 가난한 이들이 체감하는 후원의 손길은 싸늘하다.

영등포구에서 급식소를 운영하는 '토마스의 집' 봉사자는 "이때쯤이면 쌀 후원이 밀려들어오곤 했는데 올해는 아직 보지 못했다"면서 "앞으로 무료 급식을 찾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테니 밥은 줄일 수 없고, 정말 큰일"이라고 했다.

밥퍼나눔운동본부의 한 활동가는 "실제로 모금활동을 해보면 기업이든 시민이든 예년에 비해 훨씬 싸늘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30% 이상 줄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매주 두 차례 서울역 등지에서 노숙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는 조성래씨(53)는 "작년 이맘때엔 후원으로 침낭 200개가 들어왔지만 올해는 아직까지 하나도 없는 상태라 걱정이 크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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